IT업계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고도 파급효과가 컸던 사건은 IBM PC의 등장이었다고 확신한다. IT업계를 대폭발시켰던 사건이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IBM PC는 최초의 PC도, 최초의 대중적 PC도 아니다. 최초의 PC는 알테어였으며 최초의 대중적 PC는 애플II이다. 그럼에도 난 주저없이 IBM PC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단정한다.
첫번째로, IBM PC로 인해 PC 시장이 IBM의 영향력마저 벗어나 어마어마하게 성장해버렸다. IBM은 애플에 크게 뒤진 시장을 만회하기 위해 IBM PC의 구조를 공개했는데, 수없이 많은 서드파티 회사들이 그대로 따라 만들어버렸다.
결국 IBM은 자기가 만든 시장에서 거의 돈을 벌지 못했고 호환기종 업체들이 성황을 이루면서 지금과 거의 같은 구조의 PC 시장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델, 컴팩 등등도 모두 이 시기에 호환기종 업체로 먼저 이름을 알리면서 크게 성장했다. PC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정착된 것도 IBM PC 때부터다.
두번째로, IBM PC가 소프트웨어 거인 MS를 만들었다. 별볼일 없던 구멍가게 소프트웨어 업체였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급하게 PC용 OS가 필요했던 IBM과의 담판으로 IBM PC에 기본 탑재되는 OS를 납품하는 계약을 따냈고, 헐값에 사들인 다른 OS 업체의 제품을 헐값에 사들여 약간만 수정해서 PC-DOS라는 이름으로 납품했다.
IBM PC, 더 정확하게는 PC 호환기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IBM PC OEM용이던 PC-DOS외에 자체 브랜드 제품인 MS-DOS도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OEM 납품용이냐 아니냐의 차이로 이름만 달랐을 뿐 PC-DOS와 MS-DOS는 동일한 제품이었고, 결과적으로 IBM PC와 동일한 구조로 만들어진 호환PC에 MS-DOS를 이용하면 헐값에 IBM의 정품 PC와 동일하게 동작했다.
이 둘 모두 IBM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래도 사실 잘 따져보자면 하드웨어 아키텍처를 전면 개방해서 호환PC가 범람하게 만든 것은 파이를 키운다는 면에서 의도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 문제는 두번째다. OEM으로 납품되는 PC-DOS 외에 MS가 독자 브랜드의 MS-DOS를 팔도록 두어서는 안되었던 거다.
재주는 IBM이 미친듯이 부렸는데 돈은 MS가 앉아서 다 챙겼다. 당시 MS-DOS는 별반 대단할 것도 없는 수준의 초보적 OS였는데도, 정품 IBM PC에 탑재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이유로 호환PC들의 시장 표준이 되었고, 그 과실은 MS 혼자 다 챙겼다.
만약 IBM이 DOS를 직접 개발했거나 혹은 MS가 그랬던 것처럼 타사로부터 헐값에 사들여서 호환기종 업체들에게 직접 판매했더라면 어땠을까? MS는 그 이름조차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을 것이고, IBM은 수십년간 MS가 누렸던 딱 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MS의 이름은 기껏해야 베이직의 역사를 따지자면 한번쯤 거론이 될 정도였을 것.
MS가 대단하다? 빌게이츠가 천재다? 웃기지 마라. 대단한 걸 하나 꼽자면 거대기업 IBM을 상대로 배짱 하나로 일방적으로 구멍가게 MS에 유리하게 협상해서 계약을 맺은 것이 MS나 게이츠의 유일한 위대한 점이다. 게이츠의 상상력이 아무리 대단했더라도 수십년간 IT업계를 쥐고 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급력이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단지 약간의 꼼수였을 뿐인데,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 뿐이다.
헐값에 인수해서 약간 수정한 DOS로 초장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댔다. 최종 버전인 7.x 버전까지 갈 때까지 MS-DOS는 한번도 허접함을 벗어나본 적이 없음에도, 단지 IBM PC에 최초의 OS로 납품됐던 그 DOS라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산업표준이 됐고, MS를 돈방석에 앉혀놨다.
그렇게 공돈이 마구 쏟아져들어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돈을 펑펑 써대며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고,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재투자를 할 수도 있다. MS는 도스에 이어 윈도우를 만들었고, 이전보다 더 공고한 성을 쌓았다. 하지만 허접하기 짝이 없었던 윈도우가 IBM의 회심의 역작 OS/2를 시장에서 눌러버렸던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윈도우가 대단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스의 후속작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MS의 다른 모든 성공들도 이 도스와 뒤이은 윈도우의 성공에서 파급된 것이다. MS오피스를 많이들 예찬하지만, 초기 오피스 시장에는 MS오피스 못지 않은 소프트웨어들이 많이 있었고 몇몇은 더 뛰어났다. 하지만 MS가 스스로 만든 윈도우 시장에는 MS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고, 결국 MS오피스가 시장을 제패하게 된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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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의 사람들이라면 기본중의 기본급의 교양으로 다 아는 얘기다. 심지어 IT 업계 외에서도 꽤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런 뻔한 얘기를 왜 썼냐 하면. 안드로이드 때문이다.
MS는 도스 하나로 그 모든 역사를 만들어냈다. 도스가 산업표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하드웨어를 만들 뿐인 호환PC 업체들은 그냥 MS-DOS를 사다가 탑재했다. 어째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비슷하지 않나. 구글은 안드로이드에서 직접 돈을 받는 것은 없지만 그건 너무나 사소한 차이다.
구글은 최근 안드로이드의 버전을 올리 때마다 단편화(fragmentation), 즉 서로 다른 벤더로부터 나온 안드로이드 기기들의 OS 차이를 줄이려고 애쓰고 있고, 일정 부분 성과를 내고 있다. 단편화를 줄이면 줄일 수록 여러 안드로이드 기기들에 탑재된 안드로이드 OS는 점점 하나로 수렴되게 된다.
안드로이드 단편화가 극단적으로 줄어들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각 제조사들은 과거의 호환PC 제조사들의 수준으로 격하되고, 구글의 영향력은 극단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니들은 전화기나 만들어, 이렇게 되는 것.
이미 안드로이드 기기들의 하드웨어 스펙은 거의 평준화된 상태다. 각 제조사들은 서로 차별화된 스펙을 갖추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지만, 한 업체에서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면 다른 업체들도 곧바로 따라가고 있고, 뛰어난 카메라를 채용하면 역시 다른 업체들이 다 쫓아간다. 스펙상으로 차별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하드웨어 스펙의 평준화 양상에서 안드로이드 OS의 단편화를 줄이면, 제조사의 역할은 극단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호환PC와 MS-DOS의 관계와 똑같아지는 것이다.
이건 데자부다. 그런데, MS는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대한 기회를 우연적으로 주웠을 뿐인데, 구글은 아마도 처음 안드로이드 사업을 계획했을 때부터 MS-DOS의 모델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DOS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플(특히 잡스)로서는 이건 정말 욕나오는 데자부인데, 과거 애플II로 잘나가고 있을 때 IBM과 MS에 당한 딱 똑같은 전철을 밟아 iOS가 시장 점유율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여전히 iOS는 안드로이드보다 훨씬 뛰어난 OS이고, 하드웨어적으로 봐도 아이폰의 완성도는 대부분의 안드로이드 업체들이 부러워할 완성도이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안드로이드계 제조사들에게 뒤지고 있는 것이다.
구글에겐 모든 안드로이드폰들을 넥서스로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브랜드로서의 넥서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안드로이드 기기들이 제조사가 아닌 구글로부터 안드로이드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조사의 역할은 사실상 거의 제로가 된다.
구글은 다시는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시점에 안드로이드 시장을 열었다. 아이폰보다 늦었지만, 오히려 아이폰 덕분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더 쉽게 성장했다. 그리고 사실상 허울이 되어가고 있지만 무료로 뿌린다는 미끼도 주효했다. MS를 따라 이런 모델을 설계한 사람이 두 젊은 창업자인지 혹은 회장역을 맡고 있는 에릭 슈미츠인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기회를 주운 MS보다 정확한 기회에 시장을 만들어 모방한 구글이 더 천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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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젠? 윈도우폰? 안드로이드보다 먼저 나와서 안드로이드와 비슷한 모델로 접근했더라면 안드로이드의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문은 닫혔다.
MS가 IBM과 DOS 공급 계약을 맺고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당시 DOS 업계의 일인자였던 CP/M의 벤더 디지털리서치였다. 하지만 디지털리서치는 제안을 거절했다. CP/M보다 훨씬 허접했던 MS-DOS가 일단 시장을 선점한 후에, 디지털리서치는 뒤늦게 CP/M을 개량해서 MS-DOS보다 훨씬 뛰어난 DR-DOS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한번 닫힌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고, 결국 노벨에 인수되며 시장에서 사라져버렸다.
윈도우폰에 대해 MS의 잘못은 하나 뿐이다. 늦었다는 것이다. 과거 디지털리서치가 기회를 놓친 후 다시는 다시 잡지 못했던 것처럼 윈도우폰에도 더 이상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MS는 과거 초창기에 자신들이 부러워하던 디지털리서치가 놓쳤던 기회와 비슷한 양상으로 기회를 놓쳐버렸다.
물론 윈도우폰 OS 이전에도 MS는 모바일 OS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고, 2000년대 내내 윈도우모바일(윈도우폰 이전의 MS의 모바일 OS들)은 모바일 시장에서 가장 유망하다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MS의 치명적인 실수는, 모바일 시장을 자신들의 주력 시장인 PC 시장의 보조급 시장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도 UI 면에서도 PC 기술을 그대로 옮겨놓은 형태로 유지하려 노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폰 이전의 윈도우모바일은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스마트폰과는 아주 다른, PC 윈도우를 전화에 억지로 얹어놓은 듯한 어색한 모습이었다. 천재라고 흔히 칭송받는 빌 게이츠의 상상력과 창조력은 그런 수준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바일이란 본질적으로 저사양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역시 큰 패착이었다. MS와 게이츠는 누군가가 먼저 만들면 따라하는 것은 잘했어도 독자적으로 새로운 컨셉을 창조해내고 선두에서 제품화하는 것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더 뛰어난 제품, 더 뛰어난 기술력의 회사가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명제는 거의 항상 거짓이다. 적어도 IT업계에서는. 수없이 많은 더 뛰어난 제품들이 제대로 경쟁조차 못해보고 사라져간 사례들을 봐왔다. 일정규모 이상의 시장에서 기술력으로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는 동화같은 이야기는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술력보다 더 중요했던 건 항상 타이밍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절호의 기회를 적절한 타이밍에 잡지 못한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IT업계의 사례들을 돌아보면,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추월하는 일은 딱 두가지 경우에만 일어났다.
하나는 꽤 흔한데, 선발주자가 어이없는 전략적 실수를 하는 경우다. 바로 이 글의 앞에서 거론했던, IBM이 DOS 판매권을 MS에게 방치해버렸던 일이나 디지털리서치가 IBM 납품 건을 거절한 일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회는 틈새다. IT업계에서 새로운 메인스트림은 대부분 한때 틈새로 여겨졌던 구석에서 시작되었다. 거대 규모의 장비들만이 컴퓨터로 여겨지던 시절, PC라는 물건은 다들 틈새시장으로만 바라봤지만 불과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IT업계의 제1의 주류로 올라섰다.
거꾸로, 누구의 눈에도 거대 광맥으로 보이는 큰 시장은 결코 제대로 된 기회가 되지 못한다. 엄청나게 몰려든 경쟁자들로 인해 시작하자 마자 바로 레드오션으로 직행이다. 수백 수천개의 경쟁사들이 몰려 몇년씩이나 치킨게임을 거듭하다 가장 오래버티는 몇몇만이 겨우 생존할 정도의 밥을 먹을 뿐이다.
MS도 윈도우모바일 당시의 모바일 시장을 PC 시장의 틈새 시장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PC 전략의 연장선상에서만 접근했다. 애플은 아이폰에서 전혀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시장의 틈새를 캐냈고, 구글은 아이폰 광풍이 불던 시절에 아이폰이 접근하지 못한 틈새를 노렸다.
그럼 어디든 틈새를 파기만 하면 기회는 오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금맥이 숨겨진 틈새도 있을 것이고 파도파도 심연밖에 없는 틈새도 있을 것이다. 혹은 틈새를 파는 방법론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자들과 다른 시각으로 틈새를 광활환 대지로 바꿀 수도 있다.
뭐, 결론은 결국 원론이다. 빌 게이츠가 천재여서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잡스만큼 창의력 천재여야만 잡스만큼의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보는 눈, 틈새를 보는 눈이다. 즉 직관과 통찰이다.
직관과 통찰은 결국 경험과 성찰에서 나온다. 그러려면 '기회의 땅'이라고 많이 알려진 곳에 다함께 러시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곳에 더 집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물론 여러 분야들을 많이 섭렵한 사람들에게도 그 특유의 직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직접 비교가 어려운 다양한 분야의 잡다한 경험들은 소화해서 유의미한 통찰을 엮어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음.... 안드로이드와 PC 시장의 유사성에 대해 대충 몇자 써보려고 했던 게 주제를 지나쳐서 너무 멀리 와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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